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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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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교양인

정희진 지음

201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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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B>“독서는 수많은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정희진, 책 읽기의 쾌락과 고통을 말하다
</B>
세상을 보는 ‘여성주의’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던 《페미니즘의 도전》의 저자 정희진이 9년 만에 신작 《정희진처럼 읽기》로 돌아왔다. 《정희진처럼 읽기》는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부터 앤드루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까지 79권의 책을 통해 당대 우리 사회의 고통, 권력, 주변과 중심, 삶과 죽음, 지식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이 책에 담긴 79편의 독후감은 책 읽기를 통한 자기 탐구의 기록이자, 우리 사회의 통념과 상식에 대한 전복적 성찰의 기록이다.

정희진은 《천자문》에서 뜻이 없는 조사 ‘焉’이 전체 문장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의미 없음’의 권력을 떠올리고, “독단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방법에의 도전》을 읽으며 지배 규범을 ‘객관’으로 간주하고 자기 의견을 가진 집단을 편협하다고 낙인찍는 우리 사회의 인식 틀을 비판한다.
정희진에게 책 읽기란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고통, 상처를 해석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 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다. 간혹 내 글이 어둡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읽는 책은 상처에만 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삶에서 기쁨이나 행복은 없냐고 묻는다. 왜 없겠는가.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냐는 것이겠지. 행과 불행은 사실이라기보다 자기 해석에 좌우된다. 그리고 독서는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 ‘프롤로그’에서

《정희진처럼 읽기》는 어떻게 글을 읽을 것인가에 관한 정희진식 방법론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책과 독서에 관한 생각을 펼친 ‘프롤로그’,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저자 자신(과 자기 세대)의 독서 이력을 진솔하게 그린 ‘좁은 편력’, 독후감 쓰는 법을 말하는 ‘에필로그’는 ‘정희진처럼 읽기’의 바탕을 보여준다. 이 책은 독서란 각종 관습과 규범에 대한 도전이며 자기만의 고유한 인식을 확장해 가는 행위임을 깨닫게 해준다.

“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讀後感).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感想)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며 독후감도 없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 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 ‘에필로그’에서
<B>
“오래도록 쓰라린 책,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책,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자극적인’ 책,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이다.” </B>

정희진은 칼럼, 논문, 비평 등을 통해 ‘남성 언어’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통념’과 ‘상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논쟁적인 필자로 잘 알려져 있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도 정희진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과 전복적인 사유를 만날 수 있다. 정희진의 글은 차갑고도 뜨겁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하게 상식으로 받아들여 온 ‘주류’(이성애자, 남성, 비장애인…)의 시각을 비판할 때에는 무섭도록 냉철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깔려 있다. 그러하기에 그는 지치지 않고 분노하고, 공감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 언제나 현실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글쓰기, 학자들의 전문 용어가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풀어 가는 이야기는 독자들의 머리와 마음을 사로잡고 마침내 세계관을 뿌리째 뒤흔든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만나는 정희진은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친근하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삶과 죽음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 달콤한 과자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유쾌한 고백까지, 이 책에서 독자들은 끊임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정희진과 일상을 살아가는 정희진을 동시에 만나게 된다.
책의 본문은 저자가 2012년부터 2014년 봄까지 쓴 서평들 가운데 79편을 선정해 수정한 것이다. 지금 저자가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고통’, ‘주변과 중심’, ‘권력’, ‘앎’, ‘삶과 죽음’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글을 나누었다. 저자가 이 책을 위해 새롭게 쓴 세 편의 글(‘프롤로그’ ‘좁은 편력’ ‘에필로그’)에는 삶으로서 책을 읽는 행위의 깊은 의미와 독후감 쓰기에 관한 정희진다운 도발적 주장이 담겨 있다.
<B>
“이런 책을 읽을 때 세상이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B>
정희진은 스스로 “책에 관한 책을 쓸 자격이 있나 싶을 정도로 다독가나 애독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말 그대로 ‘살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이고 “독서의 즐거움에 중독”된 사람이다.

책을 의인화한다면, 그/녀는 정치적으로 치열하다. 그 사람(책)은 자기 내부의 모순까지 껴안는 명확한 당파성의 소유자다. 책은 나를 이룬다. 유려하되 아름답기보다 진실한 문장, 주장의 간절함과 정의감, 정확한 인식을 돕는 기가 막힌 표현력, 글쓴이의 노동이 고스란한 정직한 글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이런 책을 읽을 때 내 삶이 진전한다고 느끼고 세상이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문턱을 넘어서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런 글을 쓴 노동자들에게 감히 동지 의식을 느끼고(싶고), 욕심을 다스리면서도 의욕을 다짐한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므로. 좋은 사람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13쪽)
<B>
“나는 ‘자극적인 책’만 읽는 편협한 독자다.” </B>
저자에 따르면, 책 읽기는 생각이 입체화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누가, 어느 순간, 어떤 내용과 만나는가에 따라 다양한 사건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한 권으로 열 권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고, 열 권을 읽고도 한 권도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책이 독자에게 주는 영향은 우연이자 맥락의 결과이다.

어떤 시각으로 읽느냐가 읽는 내용을 결정한다. 나 역시 기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권력, 언어, 지식, 고통, 관계, 몸)가 있지만, 소재별로 읽기보다는 관점을 중심으로 선택한다. 남들이 보기엔 엉뚱한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특정한 사고방식에 집중하는 편협한 독자다. 어느 누구도 아무 책이나 읽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독자는 편협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자극적인 책’만 읽는다. 예상 가능한 내용이나 가독성이 지나치게 좋은 책은 읽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아는 이들은 내게 책 선물을 하지 않는다. 내가 주로 ‘이상한’ 책을 읽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작은 서점에 가깝다. 방송통신대학 교재부터 동물행동학, 경영학, 군사학, 영어발달사, 호스피스, 코란과 이슬람 여성 연구 관련까지…… 전공을 알 수 없다. (14~15쪽)
<B>
“모든 책은 정치적이다.” </B>
언어는 본질적으로 권력 지향적이다. 책의 ‘적통’이라는 문학은 물론이고 연애 지침서 같은 대중적인 심리학 책부터, 힐링, 웰빙 관련 책, 요리책, 여행기, 성생활 지침서, 자기계발서, 신앙 간증기, 증권 투자서까지 정치적 입장이 없는 책은 없다. 그 입장이 간접적이냐 직접적으로 드러나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무색무취처럼 보이는 책도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과학이나 철학 책이라고 해서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고, 육아 책이라고 해서 간접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대부분 정치색이 없어 보이는 책들은 자유주의나 기능주의적 시각에서 쓰인 것들이다. 자유주의적, 기능주의적 사고 체계에서는 입장, 관점, 시각 같은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중립성과 객관성을 지향한다. 이런 탈정치적 주장이 가장 정치적인 법이다. 게다가 정치성을 표방하는 경우보다 정치적 효과도 크다. (22쪽)
<B>
“좋은 독후감은 책에 없는 내용을 쓰는 것이다.” </B>
정희진은 “세상 모든 글은 독후감”이라고 말한다. “책이든 경험이든 사람이든, 대상과 접촉한 후 그 이후를 적는다는 점에서 독후감에 해당하지 않은 글은 없다.” 다만 텍스트가 책일 때 특별히 독후감이라 할 뿐이다. 또 정희진은 좋은 독후감의 전제는 ‘다르게 읽기’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알 만한 진부한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좋은 글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독후감, 내가 쓰고 싶은 독후감은 다른 시각으로 읽음으로써 ‘없는’ 내용을 만들어내는 방법, 즉 지면을 투사(透寫)하는 것이다. “행간을 읽는다.”라고도 표현한다. 다른 안경을 쓰고 읽음으로써 텍스트를 복잡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서,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경합하는 읽기이다. 경합 없는 통념(주류)의 위주로 읽는다면, 왜 다른 책을 읽는가. 경우의 수만 다를 뿐 결론은 같을 텐데. 한 권만 읽어도 세상사가 하나로 수렴될 것이다. (304쪽)
<B>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B>
정희진은 독후감이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70억 인구에 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내용이 같은 독후감도 있을 수 없다. 개인의 삶과 책이 만나서 변화가 시작되고 독후감은 그 변화의 첫 과정이다.” 그러므로 책 읽기에도, 독후감에도 정답은 없다. 책의 내용도, 책을 읽은 후의 감상과 변화도 모두 읽는 사람의 위치와 조건에 따라,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독후감, 책을 다시 쓰는 것, 저자가 쓰지 못한/않은 부분을 쓰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 곧 새로운 정치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읽는 사람도 있는데 그 차이는 왜 발생할까. 대개는 콩쥐한테 동일시하고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계모의 내면 세계나 아버지, 친척, 이웃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한 이들도 있다. 나는 팥쥐는 꼭 딸이어야만 하는가, 아들(남성)일 경우 어떻게 될까가 궁금했다. 이런 생각의 차이들은 가치 다양성, 관용, 배려 차원의 내용 확대가 아니다. 정치적 모순, 갈등, 위계의 내용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정치적 전선(戰線)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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