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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교양인

이희재 지음

2009-02-08

대출가능 (보유:1, 대출:0)

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b>'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

<b>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2008 우수저작 및 출판 지원사업’ 당선작!

'전문 번역가가 20여 년 동안 번역 현장에서 느낀 문제점을 정리하고,
그 결론을 이론화한 독창적 번역론이다. 20여 가지 주제로 수많은 사례를 제시하며,
영어와 한국어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창조적 번역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일반 독자에게는 좋은 글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알려줄 것이다.'(심사평)

<b>20여 년간 번역 현장을 지켜 온 최고의 번역가가
절실한 고민을 이론으로 갈무리한 창조적 번역론 !

2008년 한 해 동안 발행된 신간 종수는 4만 3099종(만화 포함)이며, 그중 번역서는 1만 3391종으로 전체의 31%를 차지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번역서 비중이 1위이다. 그만큼 번역문이 한국인의 말글 생활에 끼치는 영향은 크다. 특히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책일수록 번역서가 많기에 지식층과 학생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런데 한국 번역에는 이론서나 믿을 만한 실무서 하나 찾아보기 어렵고, 번역의 기본적 원칙조차 없다. 일본어 번역투, 영어 번역투 문장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서 외국어와 다른 우리말의 개성이 바랜 지 오래다.

이제 (번역의 탄생)이 우리말과 글을 바로 세우는 살아 있는 번역 원칙론을 제시한다. 20여 년간 말과 말이 치열하게 맞붙는 번역 일선에서 살아온 전문 번역가 이희재에게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 문장 하나하나를 만날 때마다 겪은 갈등과 고민이 거시적 언어 이론의 틀로 스며들어 새로운 번역론으로 탄생했다. 저자는 한국어를 좁은 ‘우리말’ 틀이 아니라 ‘다른 말’과의 관계 속에 노출시킴으로써 한국어를 ‘타인의 눈’으로 새롭게 조명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국어의 개성이 이 책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번역의 탄생)은 철저하게 한국어 현실에서 출발한 창조적 번역 이론서이자, 중국과 일본, 미국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역사를 투명하게 비추는 우리말 임상 보고서이다.

<b>외국어에 오염되지 않은, 왜곡되고 뒤틀리지 않은
반듯하고 생생한 한국어의 개성을 찾아 떠난다 !

언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제국주의 국가가 예외 없이 식민지에서 종주국의 언어를 강요한 것도 언어를 통해 식민지 주민들의 정신을 장악하고 영구히 노예화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번역의 탄생)에서 저자는 한국어의 논리보다 외국어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한국 번역의 현실을 통해 해방 후 두 세대가 지나도록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한국 주류 계층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한국의 사정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같은 번역이라도 일본이 일찍부터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책을 직접 번역하는 직거래 방식으로 제 문화의 틀을 세웠다면 한국은 일본이라는 중간상을 거쳐서 서양 문화를 간접적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을 통한 한국의 서양 문화 수용을 나는 ‘기원의 은폐’라고 부르고 싶다. --
일본을 통한 간접 수용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다. 이제는 자기만의 눈과 귀로 세상을 보고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예전보다는 문화 교류의 창구가 넓어졌고 직거래도 늘어났지만 한국을 이끌어 가는 주류 가운데는 아직도 다른 나라를 졸졸 따라가야만 마음이 놓이는 유아 의식에 갇힌 사람이 많다. 이미 오래전에 걸음마를 떼었건만 아직도 음식을 떠먹여주기만을 바라는 ‘어른애’가 많다. 스스로 제 갈 길을 헤쳐 나가고 사유하는 데 서투르다. 제 손으로 새 말을 만들기를 두려워하고 아직도 일본에서 나온 영일사전에 기대어 영한사전을 만드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몸은 다 큰 어른인데 여전히 아이처럼 종주국만 쳐다보는 한국 주류의 머리가 머무른 현주소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두 세대가 넘은 나라에서 식민 통치를 찬양하는 세력이 목소리를 되높이는 일도 그래서 벌어진다. ― ‘머리말’에서

쉬운 우리말을 두고 어려운 한자어와 외래어를 즐겨 쓰는 세태를 비판하며 평생 동안 바르고 쉬운 우리말 쓰기 운동을 벌였던 이오덕 선생,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막힘 없이 읽을 수 있는 우리말과 글’을 내세운 잡지 '뿌리 깊은 나무'를 펴내 순 우리말을 고급 문자 언어로서 새롭게 조명한 한창기 선생은 우리말 바로 쓰기의 선각자들이었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의 터전을 가꾸는 데 힘을 실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번역의 탄생)은 여러 선각자들이 이어 온 우리말과 정신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번역이라는 영역으로 확장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우리말과 외국어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대결하는 번역 현장이야말로 가장 치열하게 우리말과 글의 쓰임새를 고민할 수 있는 곳인 바, 번역을 하면서 비로소 우리말에 눈을 떴다고 고백한다.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 작가가 되어 한국어 자체만을 놓고 씨름했더라면 한국어의 개성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어, 일본어, 독일어 같은 외국어와 한국어를 넘나들다 보니 한국어의 남다른 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연하기만 했던 한국어답다는 개념이 차츰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국어가 이미 번역서를 통해 영어와 일본어에 상당히 깊이 물들었음을 깨달았다. 번역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때부터 조금씩 바뀌었다. 이미 외국어에 많이 물든 한국어에 외국어 문체의 흔적을 더 남기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원문에서 멀어지는 고공 비행의 길로 날아올랐다. 이 책은 잃어버린 한국어의 창공을 향해 한없이 날아오르고 싶었던 내 마음의 비행 일지인 셈이다. ― '머리말'에서

번역은 짝짓기다. 단어의 일대일 대응이 아니라 두 말에 담긴 정신의 핵심을 대응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번역은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며 ‘두 말에 담긴 정신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번역가는 저울 한쪽에 저자의 말을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 번역어를 올려놓은 뒤 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 작업을 계속한다. 그런데 한국의 번역 문화는 그동안 한쪽으로만 쏠렸다. 지나치게 출발어(원어)의 눈치를 보면서 원문에만 충실하려 했다.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우러러보기만 했다. 한국어 논리보다 영어, 일본어 논리에 충실한 번역으로 저울은 기우뚱하다. 한국어의 논리를 제대로 알 때 한쪽으로 치우친 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다.

한국어의 논리는 무엇일까? 이제까지 한국어는 지나치게 ‘우리말 틀’ 안에만 갇혀 있어 오히려 제 모습을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번역의 탄생)은 번역 현장에서 찾아낸 한국어의 고유한 개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영어는 사물을 주어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어는 주어 자리에 딱딱한 추상 명사보다는 사람이 오는 걸 좋아한다. 또 영어는 한국어보다 추상성과 보편성을 담는 데 강하고 한국어는 구체성과 특수성을 나타내는 데 강하다. 명사와 형용사를 중시하는 영어의 논리를 따라 번역을 하면 구체적이고 생생한 부사가 풍부한 한국어의 개성이 죽는다. 한국어의 특징을 ‘우리말’ 영역 안에서만 누릴 게 아니라 번역에서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국어의 영역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한국어가 지닌 개성을 더욱 풍요롭게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자기 언어의 현실을 바로 보고 두 말의 균형을 잡으려 한다면 한국어가 지닌 개성을 더욱 창조적으로 살찌울 수 있다. 가령, 저자는 접두사와 접미사의 폭을 넓혀 외국어를 정확하고 간결하게 우리말로 옮기는 방법을 보여준다. 서구 이론가의 추상적 틀이 아닌 한국어 현실에서 출발한 이론 틀과 구체적 삶에 뿌리를 둔 한국어 재창조의 방법은 번역가뿐 아니라 우리글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쓰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선사한다.

<b>‘길들이기’와 ‘들이밀기’

번역가는 언제나 ‘직역’과 ‘의역’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선택하는 것은 곧 ‘도착어(번역어)’를 중시할 것이냐, ‘출발어(원어)’를 중시할 것이냐의 문제다. 원문을 도착어인 자국어에 맞춰 ‘길들이기’ 할 것이냐, 조금 거칠더라도 출발어에 충실한 직역으로 ‘들이밀기’를 할 것이냐. 정답은 없지만 번역할 때 기본 원칙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저자는 원문보다 한국어에 충실한 번역을 지향한다.

저는 직역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사실은 존중합니다. 하지만 제가 존중하는 직역주의는 어떤 절실함이 바탕에 깔린 마음입니다. 가령 중국의 루쉰 같은 작가가 보였던 모습입니다. 루쉰은 중국이 열강에 먹힌 것은 봉건 전통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전통과 결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루한 습속에 물든 중국어도 뜯어고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직역이라는 어려운 길을 골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루쉰도 번지르르한 새 어휘를 나열하면서 허세를 부리는 당대 지식인들은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직역주의에서는 루쉰의 절실함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게 식민지 대접을 받았고 그때마다 그들에 대한 깊은 열등감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통을 살리기보다는 앞섰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모방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한국어는 이미 중국어와 일본어와 영어의 영향을 지나치리만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남아 있는 한국어의 개성을 지키는 쪽, 다시 말해서 의역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균형을 잡는 의미에서도 옳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 '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33~34쪽)에서

저자는 번역을 ‘들이밀기’와 ‘길들이기’로 나눠 생각한다. 들이밀기는 출발어, 즉 원어를 중시하는 직역주의 정신에 충실하다. 길들이기는 도착어, 즉 자국어의 표현을 중시한다. ‘들이밀기’와 ‘길들이기’는 저자의 오랜 번역 경험이 도달한 새로운 번역 개념이다.
기존 번역 지침서가 어구를 옮기는 번역의 기술에 치중하면서 하나하나의 테크닉을 나열하는 데 그쳤다면, 이 책은 뿔뿔이 흩어진 단편적 문제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번역의 기본 원칙과 우리말에 대한 이해에 대해 정리된 안목을 일관되게 제시한다. 이를테면, 외국어보다 한국어가 더욱 섬세한 영역에서는 의미를 좀 더 촘촘히 번역해주는 것이 한국어에 더 자연스럽다는 데서 나온 ‘좁히기’ 이론이라든가, 이중부정으로 긍정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특성이 강한 한국어 개성을 살리려면 영어 원 단어의 뜻을 한번 뒤집어 생각해야 한다는 ‘뒤집기’ 이론은 번역가의 치열한 현장 경험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이론 틀이다.

extremely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아주’이지만 두 말의 외연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부사가 그런 점이 두드러지는데, 저는 한국어는 표현이 아주 풍부하기 때문에 개별 어휘의 외연은 좁으며, 따라서 외연이 넓은 영어 어휘를 외연이 좁은 한국어 어휘로 잘게 쪼개어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직역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 전치사도 구체적으로 나타내주면 좋습니다. 가령 'The two parties fought the last election on almost identical manifestos.' 같은 영문은 '지난 선거에서 두 당은 엇비슷한 공약으로 겨루었다.'보다는 '지난 선거에서 두 당은 엇비슷한 공약을 내걸고 겨루었다.'라고 옮기는 것이 훨씬 명확합니다. 영어 전치사는 명사와 명사를 접착제처럼 이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사실은 동사에 가까운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그 동사의 뜻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면 좋습니다. 가령 the agreement between the two countries도 ‘두 나라 사이의 합의’라고만 옮길 것이 아니라 때로는 ‘두 나라 사이에서 이루어진 합의’라고 옮길 필요가 있습니다. 어려운 책일수록 이런 주변적 표현만이라도 구체적이고 쉽게 써주어야 합니다.
- '12장 좁히기'(216~217쪽)에서

도착어 중심의 번역, 곧 길들이기 번역은 역사적으로 모국어에 자신감을 가질 때 강해진다. 19세기부터 번역을 통해 서양 문물을 흡수한 일본은 처음엔 원문을 신성하게 여기면서 직역주의 정신에 충실했다. 하지만 실험이 쌓이면서 이제는 철학서마저도 자연스러운 일본의 일상어로 옮기려는 시도를 할 만큼 자국어의 표현에 자신감이 생겼다. 영미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일본도 외국어 원문을 자국어에 ‘길들이는’ 식으로 이제는 돌아선 셈이다. 그러나 한국의 번역 문화에서 언어의 저울은 언제나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쏠렸다. 지나치게 출발어의 눈치를 보았다. 원문에 충실하다 못해 분명히 한국어로 쓰여졌는데 한국인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비틀리고 왜곡된 번역문, 한국어 논리보다 영어 논리에 충실한 번역으로 저울은 기우뚱하다. 한국어의 논리를 제대로 알 때 한쪽으로 치우친 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어의 개성, 한국어만의 논리는 무엇인가?

<b>추상성보다 구체성, 보편성보다 특수성에 강한 한국어

한국어는 대명사보다는 명사를 선호하고, 명사보다 동사를, 형용사보다 부사를 중시한다. 한국어는 교착어이기 때문에 어미와 접사를 풍부하게 활용할 수 있다. 존칭어가 발달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한국어의 특징을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 일본어와 견주고 분석해 차이를 이론적으로 드러냈다는 데 장점이 있다.

한국어보다 영어에서 명사의 활동 반경이 훨씬 더 넓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프랑스어에서는 명사의 활동 반경이 영어보다 더 넓습니다. 프랑스어는 영어보다 명사를 더 많이 써서 정적이고 추상적인 느낌을 줍니다. 반면에 영어는 동적이고 구체적인 느낌을 줍니다. 프랑스어는 무엇보다도 형식, 확정된 상태, 분석을 통해 현실에서 잘라낸 조각들을 나타내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프랑스어는 또 사건을 실체로 제시하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처럼 명사를 동사나 부사, 형용사 같은 다른 품사로 바꾸어줘야 할 때가 많습니다. 가령 프랑스어 'J’ai faim.'은 영어로는 'I have a hunger.'가 아니라 'I am hungry.'가 제격이고 'J’ai froid.'는 ' have a coldness.'가 아니라 'I am cold.'가 어울립니다. 또 'Je n’?tais pas l? ? leur arriv?.'는 'I wasn’t there at his arrival.'이 아니라 'I wasn’t there when they arrived.'라고 옮기는 쪽이 영어답습니다. - '2장 한국어의 개성'(39쪽)에서

한국어에서 부사는 영어에서보다 섬세하게 쓰입니다. 그것은 부사의 종류가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령 'A dog suddenly attacked me.'라는 영문을 한국어로는 '개가 나한테 갑자기 덤벼들었다.' 정도로 옮길 수 있겠지요. 무난한 번역입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번역이기도 합니다. 한국어가 지닌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뜻은 같더라도 누구한테 갑자기 덤벼드는 상황을 묘사할 때는 ‘홱 덤벼들었다’라고 하면 더 실감이 나지 않을까요. 또 'Dark flames suddenly rose up.' 같은 문장은 '검은 연기가 갑자기 치솟았다.'도 괜찮겠지만 '검은 연기가 확 치솟았다.'라고 하면 연기가 꾸역꾸역 치솟는 모습이 정말 눈에 선하게 그려지겠지요. 마찬가지로 'A policeman suddenly appeared.'는 '경찰이 갑자기 나타났다.'보다 '경찰이 불쑥 나타났다.'라고 옮기면 읽는 사람은 가슴이 더 콩닥콩닥 뛰지 않겠습니까. - '7장 죽은 문장 살려내는 부사'(116~117쪽)에서

한국어의 특징을 ‘우리말’ 영역 안에서만 누릴 게 아니라 번역에서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국어의 영역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길들이기’ 번역이 이뤄질 수 있다.

<b>역사적.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유연한 번역 이론

모든 선택에는 이유가 있다.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옮길 때에도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한다. 단어 하나 전치사 하나를 옮기는 데에도 역사적이고 시공간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장점은 그저 사례를 ‘들이미는’ 게 아니라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공시적이고 통시적으로 바라보면서 맥락을 짚어주는 데 있다. 단순히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좀 더 깊숙이 언어 구조의 차이를 들여다본다. 더 넓은 설명의 틀 속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그만큼 유연하고 설득력이 있다.
예컨대 저자는 토박이말을 써주어야 한다. 특히 어린이 책을 번역할 때 적어도 형용사, 부사, 동사는 토박이말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토박이말 번역이 바로 소통의 효율을 높이기 때문이다. 동사를 한자어가 아니라 토박이말로 써주면 가독성이 높아지고 내용을 솜처럼 쉽게 빨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개념어일 경우 토박이말을 무조건 주장할 수 없다. 외국어에서 새로운 관념과 용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의 원산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합리적 태도가 아니라는 것, 이러한 유연성은 저자 번역 이론의 또 다른 장점이기도 하다.

토박이말을 쓰는 까닭은 민족주의를 주장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머리에 잘 들어온다는 소박한 이유에서입니다. 가령 영국 성공회에는 High Church, Low Church, Broad Church 같은 다양한 종파가 있었습니다. High Church는 권위와 전례를 중시하는 가톨릭에 가까운 입장이고 Low Church는 의식보다는 복음을 중시하는 입장, Broad Church는 포용성을 중시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 세 단어를 보통 영한사전에서는 각각 ‘고교회파’, ‘저교회파’, ‘광교회파’로 풀이합니다. 이것을 ‘높은 교회파’, ‘낮은 교회파’, ‘넓은 교회파’라고 해주면 훨씬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을까요? 특히 ‘광교회파’라고 하면 아마 독자들 대부분은 ‘넓을 광’을 떠올리기보다는 ‘빛 광’을 떠올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한글로만 쓴다고 해서 언문일치가 아닙니다. 정말 언문일치체는 말하듯이 쉽게 쓰는 글을 말합니다. 말하듯이 쉽게 쓴 글은 꼭 눈으로 읽지 않고 귀로 듣기만 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글입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기만 해도 알아들으려면 토박이말을 많이 써주어야 합니다. - '16장 느낌이 사는 토박이말'(290쪽)에서

저자는 어려운 책일수록 번역어 선택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를 줄여 독자의 진입 장벽을 낮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유 명사는 말 그대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고유 명사 중에는 번역어는 없고 원어만 있는 단어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번역어와 원어의 문화적 거리가 멀 때 원어를 그대로 드러내면 독자는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번역자가 설명을 덧붙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설명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석을 달아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본문 안에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학술서인 경우나 학술서가 아닌 경우라도 그 말이 굉장히 중요한 뜻을 지닐 경우에는 주석을 달아주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학술서도 아니고 그 말이 핵심적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경우에 주를 너무 많이 달아주면 독자가 책에 집중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때는 본문에다 풀어서 설명해주면 좋지 않을까요. 다음은 소설의 한 대목입니다.

'Let’s talk about Bonfire Night.' Jacob relaxed now that the conversation was within his range. The fifth of November was one of the landmarks of Jacob’s year. He started looking forward to it months in advance.
'밤에 폭죽 터뜨리는 얘기나 하자.' 제이콥은 이제 자기가 끼어들 수 있는 대화를 하니까 마음이 풀어졌다. 가이 폭스라는 가톨릭교도가 잉글랜드 국왕을 시해하려던 음모를 사전에 적발한 것을 기념하여 해마다 11월 5일 밤에 터뜨리는 폭죽 놀이는 제이콥한테는 한 해의 가장 중요한 사건에 들어갔다. 몇 달 전부터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이 폭스 데이’를 알지만 한국인은 그날이 무슨 날인지 모릅니다. 더구나 원문에는 ‘가이 폭스’라는 이름도 안 나오고 그저 폭죽을 터뜨리는 날이라고만 나옵니다. 그래서 '가이 폭스라는 가톨릭교도가 잉글랜드 국왕을 죽이려던 음모를 미리 적발한 것을 기념하여 해마다 11월 5일 밤에 터뜨리는 폭죽 놀이'라고 원문에 없는 내용을 덧붙여서 번역했습니다. 가이 폭스는 실존 인물이지만, 허구의 세계에서도 가령 작품명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고유 명사가 적지 않습니다. - '13장 덧붙이기'(225~226쪽)에서

<b>한국 번역의 가능성과 방향을 제시한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한국 번역어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한국어 개성을 살릴 다양한 잠재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어 한국어로 글을 생산하고 다루는 모든 이에게 한껏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예컨대 영한사전에서 미흡하게 처리한 한자와 토박이말 접사를 두루 사용하면 우리말에 조금 더 가까운 번역어를 만들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참신한 한국어로 번역어를 살찌울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다. 번역자가 사전을 뒤지는 까닭은 모르는 낱말을 찾기 위해서일 때도 있지만 참신한 표현을 찾아내기 위해서일 때도 있다. 한국어 번역의 잠재력을 적극 끄집어내려면 외국어 사전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외국어 사전의 현실은 건국 60주년을 강조하는 지금도 여전히 해방 이전 전통의 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 역시 다른 말의 현실을 우리말의 현실에 ‘들이밀어’ 온 결과다.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자국어 현실을 바로 보는 일을 비로소 이 책에서 시작한다.

사전에 나온 풀이어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전도 살아 있는 표현의 아주 일부만을 담아낼 뿐입니다. 사전은 말의 지도입니다. 지도가 살아 있는 땅을 추상화하여 나타내듯이 사전도 살아 있는 말을 체로 걸러 뼈만 추려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뛰어난 지도는 땅 자체이듯이 가장 뛰어난 사전은 사람 머릿속에 날것으로 들어 있는 낱말들입니다. 번역자는 자기 머리에 들어 있는 그 팔팔한 말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프랑스의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도 번역자는 사전이 보여주는 등가어가 아니라 ??우리 기억의 사전’에 있는 말을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억의 사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책, 좋은 문장을 평소에 많이 읽고 머릿속에 담아 두어야 알찬 기억의 사전이 만들어집니다. --
기억을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오는 말은 천상 새로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땅한 표현이 없을 때는 적극적으로 말을 만들어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영한사전은 그런 점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스스로 말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영일사전에서 먼저 말을 만들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때가 많았습니다. 한국은 60여 년 전에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조어를 놓고 보면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에 가깝습니다. 종주국에서 먼저 말을 내놓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 줄을 모릅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스스로 말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 '18장 말의 지도, 사전'(363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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