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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미식가들

휴머니스트

주영하 (지은이)

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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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영조의 고추장에서부터 사대부 부인의 집밥까지,
맛 좀 아는 그들의 맛깔스런 문장들


소주를 마시고 “훈기가 뼛속까지 퍼지네”라는 감탄을 한시로 읊조린 이색, 매운 것을 좋아해 고추장과 마늘을 듬뿍 올린 쌈을 즐긴 이옥, 겨울밤 술과 함께 먹는 열구자탕을 극찬한 이시필, 고추장을 최애한 영조, 집안의 요리법을 기록해 대대로 전한 사대부 부인들. 음식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해석해온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교수가 이번에는 조선시대 미식가들이 남긴 ‘음식 글’에 주목했다. 찜과 탕을 비롯해 회와 젓갈, 후식과 술에 이르기까지 그 맛을 음미하고 즐긴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시대 음식의 역사는 물론, 우리 선조들이 음식을 즐기던 방법까지 살필 수 있다. 조선 미식가들의 안내에 따라 조선의 맛을 즐겨보자!

1. 주영하 교수, 군침 도는 ‘음식 글’에 빠지다
―조선의 미식가 15인의 음식 취향과 경험으로 쓴 음식문화사


음식을 문화와 인문학, 역사학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연구해온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교수가 본격적으로 조선시대 음식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조선의 미식가들》은 오늘날 전하는 조선시대 문헌을 두루 살펴 직접 먹거나 만들어본 음식에 관한 글을 남긴 15명을 뽑아, 그들의 글을 통해 음식 취향과 경험을 들여다보았다. ‘조선의 미식가’로 뽑힌 왕과 어의, 선비, 사대부 여성 등 15명은 살았던 시대도, 남긴 글의 형식도 신분이나 성(性)도 다르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각각의 시대에 유행했던 음식과 식재료, 요리법, 그리고 생생한 ’식후감(食後感)‘까지 살필 수 있다.
프랑스의 법률가 장 알텔므 브리야샤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라며 개인의 음식 취향과 경험을 통해 그의 삶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조선의 미식가 15인은 자신들의 음식 경험을 글로 남겼다. 주영하 교수는 이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면 조선시대 ‘음식의 역사’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15인이 실제로 요리하고 먹고 즐긴 ‘음식 이야기’를 들려주며 성글게나마 조선시대 음식문화사를 선보인다.

맛에 대한 취향은 시대마다 다르다. 한 사람의 음식 경험에는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의 정황과 역사가 담겨 있다. 이 점에 주목하여 나는 2011년부터 ‘음식에 관한 글’을 쓴 조선시대 지식인들을 저자별로 나누어 자료를 정리해왔다. …… 조선시대 500년의 실재(real) 식생활과 음식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에 내가 다루려고 했던 인물은 100명이 넘는다. 이들을 모두 다루려면 앞으로도 10년 이상의 공부가 더 필요하다. …… ‘음식 글’을 통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밝혀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면 조선시대 실재했던 ‘음식의 역사’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책을 펴내며〉 중에서, 6쪽

2. 조선 미식가들의 색다른 음식 취향을 엿보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음식 취향과 유행


이 책에서는 다섯 가지 사건과 시기로 한반도의 음식 역사를 구분한다. 첫째 불교의 유입에 따른육식 기피, 둘째 원나라 간섭기 육식 문화의 확대와 새로운 음식 유행, 셋째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 된 성리학의 영향, 넷째 17세기 본격 시작된 연행사의 청나라 방문, 다섯째 ‘콜럼버스 교환’으로 새로운 식재료의 등장이다. 조선 미식가 15인의 글에서도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음식 취향과 경험이 등장한다.
고려 말 조선 초를 살았던 이색은 원나라에서 들어온 소주와 두부에 관한 시를 지었고, 조선 중기 연행사로 연경을 다녀온 김창업은 중국에서 맛본 새로운 음식에 관한 글을 남겼다. 정조 때의 학자 홍석모는 세시기를 통해 조선 후기 민간의 세시풍속을 자세히 기록했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음식만을 주제로 한 글은 흔치 않았지만, 허균과 김려, 이옥 등 직접 맛본 음식에 관해 글을 남긴 사람도 있었다. 허균은 조선 팔도에서 먹어본 음식의 품평과 함께 먹은 장소, 요리법, 잘 만드는 사람과 명산지 등의 정보를 〈도문대작〉에 자세히 기록했고, 이옥은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의 맛과 먹는 방법을 글로 남겼다. 김려는 귀양살이를 하며 박물학적 관심에서 어류학서 《우해이어보》를 썼는데 글에서 그의 넘치는 식욕이 엿보인다.
18세기 들어 조선의 식탁에 오른 고추는 이옥이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기도 했다. 고추 마니아라 할 정도로 그가 남긴 글에는 고추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 조선 왕들 가운데 가장 장수한 영조의 최애 음식도 고추장이었다. 어의였던 전순의와 이시필은 왕의 건강과 장수를 위한 음식에 신경을 쏟으며 요리법을 기록했다. 이들의 기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함께 살펴보면 왕들의 음식 취향과 경험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음식 글’ 하면 사대부 남성들과 여성들을 빼놓을 수 없다. 스스로 군자임을 자임했던 김유와 조극선, 이덕무가 남긴 요리책과 ‘음식 글’은 당대 선비들의 식생활과 음식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사대부 여성들은 서재에서도 요리법을 궁구하고 부엌에서도 음식을 만들었다. 장계향과 빙허각 이씨는 손수 요리책을 지어 집안 대대로 물려주었고, 여강 이씨는 집을 떠나 임지에 있던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며 요리법과 음식 맛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사대부가 여성들이 남긴 글은 조선시대 지배층의 식생활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술 속의 영특한 기운만 있으면, 어디에 기대지 않아도 되네, 가을 이슬처럼 둥글게 맺혀 밤이 되면 똑똑 떨어지네. 청주의 늙으신 종사〔靑州老從事, ‘오래된 좋은 술’〕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니, 마치 하늘의 별과 같이 뽐내게 만드네. 도연명이 이 술을 맛보면 깊이 고개 숙일터, 굴원이 맛을 보면 홀로 깨어 있으려 할지. 반 잔 술 겨우 넘기자마자 훈기가 뼛속까지 퍼지니, 표범 가죽 보료 위에 앉아 금으로 만든 병풍에 기댄 기분이네.” …… 주당이라면 빈속에 술 한 잔 털어 넣었을 때의 느낌, 즉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쫄쫄 내려가며 위장에 이르는 그 느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색은 그 느낌을 ‘뼛속까지 퍼진다’고 했다. 더욱이 술맛을 잘 아는 사람(도연명)과 술 취하기를 거부한 사람(굴원)조차 반할 정도라고 읊조렸다. 도대체 이 술의 정체는 무엇일까? ―〈“훈기가 뼛속까지 퍼지니” 이색의 소주〉 중에서, 25쪽

(연행사로 떠나게 된) 김창업은 간식거리로 전복·쇠고기·꿩고기·홍합·대추·인삼 등을 말린 것을 준비했고 전약·약과·청심원도 챙겼다. 아마도 매일 아침 길을 나설 때마다 그중에서 몇 가지를 가죽주머니에 덜어 넣었을 것이다. 김창업은 간식거리를 현지에서 만난 중국인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어느 중국인은 전약과 약과를 선물로 받고서 그 만드는 방법을 묻기도 했다. 간식거리 중에서 특히 청심원이 인기였다. 청심원을 받은 중국인들은 약효가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1713년 음력 1월 3일 연경에 머물던 김창업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늘 죽통에 넣어두었던 초장(炒醬)을 꺼내어 먹었다.” …… ‘초장(炒醬)’의 한자를 보면 ‘볶은 장’이지만, 김창업의 글로는 고추장인지 된장인지 무엇을 볶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이쯤 되면 해외여행을 가면서 고추장이나 깻잎장아찌 따위를 짐 속에 챙겨 넣는 요사이 한국인과 김창업 일행이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돼지고기를 찍어 먹으니 참으로 맛있었다” 김창업의 감동젓〉 중에서, 46~50쪽

어릴 적부터 입맛 이 남달랐던 허균은 막상 유배지에 와서 보니 “쌀겨조차 부족했고 밥상 위의 반찬이라곤 썩어 문드러진 뱀장어나 비린 생선에 쇠비름과 미나리뿐이었다. 그나마 하루에 간신히 두 끼를 먹다 보니 종일 배가 고팠다.” 결국 허균은 “여러 음식을 종류대로 나열해 기록하고 때때로 보면서 고기 한 점을 눈앞에 둔 셈” 치기 위해 글을 썼다. 그리고 글의 제목을 ‘푸줏간 앞에서 크게 입맛을 다시다’라는 뜻으로 ‘도문대작(屠門大嚼)’이라고 붙였다. …… 〈도문대작〉에서 언급된 지역은 동해·남해·황해를 비롯하여 조선 팔도에서 빠지는 곳이 없을 정도다. “벼슬한 뒤로는 남북으로 임지를 옮겨 다니며 이런저런 음식을 대접받았다. 이쯤 되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음식이라면 고기며 나물이며 먹어보지 않은 게 없다”고 하니, 그야말로 허균은 ‘식신로드’의 주인공이었던 셈이다.
―〈“맛이 매우 좋아서 두텁떡이나 곶감찰떡마저도 크게 미치지 못하는구나” 허균의 석이병〉 중에서, 81~84쪽

새로 한반도에 유입된 이 두 가지 채소 중에서 이옥은 고추를 유별나게 좋아했다. 그는 겨자장보다 고추장을 더 즐겨 먹었다. 서울에 있을 때를 회상해보매, 술집에 들어갈 때마다 연거푸 술을 몇 잔 마시고 손으로 시렁 위의 붉은 고추〔紅椒〕를 집어서는 가운데를 찢어 씨를 빼내고 장(醬)에 찍어 씹어 먹으면 주모가 반드시 흠칫 놀라며 두려워했다. 남양(南陽)에 살게 되면서 가루를 내어 양념장〔?汁〕을 만들어 생선회와 함께 먹는데, 역시 겨자장〔黃芥汁〕보다 나았다. 이렇게 고추를 좋아했던 이옥은 남양 집의 채마밭 근처 조그만 땅에 다 고추를 심었다. ―〈“가슴이 시원스럽게 뜷리는 듯했다” 이옥의 겨자장〉 중에서, 109쪽

영조는 고추장을 언제부터 먹었을까? 1752년 음력 4월 10일자 《승정원일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날도 도제조 김약로가 “조종부의 장은 과연 잘 담갔다고들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영조는 “고추장은 근래 들어 담근 것이지. 만약 옛날에도 있었다면 틀림없이 먹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승정원일기》에서 고추장과 관련된 이 단어들을 검색하면 영조 대에서만 22건이 검색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영조야말로 조선 국왕들 중에서 가장 고추장을 즐겨 먹은 왕이 아니었을까 싶다. 심지어 75세의 영조는 스스로 “송이·생복(生鰒)·아치(兒雉, 어린 꿩)·고초장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이로써 보면 입맛이 영구히 늙은 것은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고추장을 즐겨 먹었다.
―〈“지난번에 처음 올라온 고추장은 맛이 대단히 좋았다” 영조의 고추장〉 중에서, 163~164쪽

3. ‘탐식’을 경계하는 절제의 미식가들
―조선 선비들의 음식을 대하는 태도


조선이 선비들은 산문과 시, 일기, 편지 등에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지만, 음식의 절제를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허균은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성이요, 특히 식욕은 생명과 관계된다”면서 “옛 선현들이 먹고 마시는 일을 천히 여겼던 것은 먹는 것을 탐해 이익을 좇는 일을 경계한 것이지, 어찌 먹는 일을 폐하고 음식에 관해서는 말도 꺼내지 말라는 것이겠는가?”라고 강변하며, 음식 자체가 아닌 탐식을 경계해야 함을 역설했다. 실학자이자 저술가였던 이덕무 역시 음식을 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글로 남겼다. 선비·부인·자녀가 지켜야 할 예절을 다룬 《사소절》에서 그는 “음식을 탐내게 되면 …… 모든 병이 생길 뿐 아니라, 탐식으로 인해 사치할 마음이 생기고, 사치로 인해 도둑의 마음이 생기고, 도둑의 마음으로 인해 사나운 마음이 생긴다”라며 어른은 물론 자녀들에게 탐식을 가장 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옥 또한 일찍이 글을 통해 음식 사치에 대해 비판했고, 서로 다른 지역 사람들이 자기네 음식이 더 낫다며 다투는 모습에 “각기 좋아하는 것이 다를 뿐인데, 어느 것이 짧고 어느 것이 길단 말인가”라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또 이옥은 “먹을거리는 다만 맛으로 취하여야 하고 명성으로 취하지 말아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다들 이식(耳食, 귀로 먹는다)을 하여 이름만 취하고 맛으로 취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맛집 소문만 듣고 문전성시를 이루는 모습을 지적한 것이다.

허균을 탐식가로 보는 연구자도 있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탐식이 아닌 절제의 미식가였다. 그는 자신의 음식 경험을 적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세상의 현달한 자들이 음식 사치를 끝없이 벌이며 절제하지 못하고 있지만 부귀영화라는 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점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글을 썼다고 밝혔다. ―〈프롤로그〉 중에서, 17쪽

이옥은 평안도와 경기도 사람이 기장밥과 보리밥을 두고 서로 맛있다고 다투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평안도 사람과 경기도 사람이 곡식의 성질을 논하면서 경기도 사람은 ‘보리밥이 낫다’고 하고, 평안도 사람은 ‘기장밥의 맛남만 못하다’고 하여, 드디어 각자가 고집하여 조정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경기도 사람이 보리로 밥을 짓고 평안도 사람이 기장으로 밥을 짓는 것은 각기 좋아하는 것을 따를 뿐이다. 어느 것이 짧고 어느 것이 길단 말인가”라고 일침을 놓았다. 한마디로 식성(食性)의 문화상대주의를 설파한 것이다. ―〈“가슴이 시원스럽게 뜷리는 듯했다” 이옥의 겨자장〉 중에서, 121쪽

이덕무는 조선시대 지식인 중에서 가장 많은 ‘잔소리’를 글로 남겼다. 그가 쓴 《사소절》은 잔소리의 압권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덕무 는 《사소절》에서 선비·부인·자녀의 예절을 다루었다. 그중 첫 번째 대상인 선비를 향해 쓴 잔소리가 바로 〈사전(士典)〉이다. …… 음식이 나오면 즉시 먹으라든지, 남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할 때도 그 집의 형편을 염려하라든지, 집에 색다른 음식이 있거든 아무리 적어도 노소와 귀천을 따지지 말고 고루 나누어 먹으라든지 등등 먹는 일에서 지켜야 할 작은 예절을 꼼꼼하게 제시했다. …… 이덕무의 음식 예절에 관한 잔소리를 읽다 보면 당시 선비들의 식생활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목구멍에 윤낸다고 기뻐하지 말라” 이덕무의 복국〉 중에서, 209쪽

4. 어머니가 딸에게, 부인이 남편에게 전한 집밥 레시피
―사대부 여성들이 남긴 요리책과 ‘음식 글’


사대부 여성들은 서재에서 요리법을 궁구했을 뿐 아니라 부엌에서도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전근대 시기 여성은 사적 영역에서 요리의 주체였다. 이 책에서 소개한 남성 대부분이 먹는 데에 치중했다면 여성들은 주로 요리법을 글로 남겼다.
조선시대 여성이 쓴 가장 유명한 요리책으로 장계향이 쓴 한글 요리책 《음식디미방》과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를 들 수 있다. 이 두 책에는 딸과 며느리에게 전해준다는 말이 적혀 있다. 전근대 시기 요리법은 어머니에게서 딸에게,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에게 대대로 전해졌고, 같은 당파나 혼인으로 맺어진 집안 사이에 공유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대부 여성들이 남긴 요리법이 모두 ‘나만의 혹은 집안의 비법’은 아니었다. 장계향의 《음식디미방》에서는 어느 책에서 가져왔는지,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어느 마을의 요리법인지 등도 밝히고 있다. 《규합총서》 역시 직접 만든 음식뿐 아니라 듣거나 배운 요리법도 함께 기록했다. 또 요리책은 아니지만 여강 이씨가 집을 떠나 다른 지역 현감으로 있던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식재료와 요리법, 음식 맛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대부 여성들이 남긴 요리책과 음식 글은 옛 음식뿐 아니라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살림살이와 식생활을 살피고 재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규곤시의방’에서 ‘규곤(閨?)’은 여성들이 거처하는 공간인 ‘안채’를 뜻하고, ‘시의방(是議方)’은 ‘알아야 할 방법’이라는 뜻이다. 즉 ‘규곤시의방’은 ‘안채에서 알아야 할 방법’이란 말이다. 그런데 책의 본문 첫 장에는 한글로 ‘음식디미방’이란 말이 나온다. 약간의 논란은 있지만, 한글 ‘음식디미방’의 뜻을 한자로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으로 보아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고 풀이한다. 권두에 밝혀놓은 이름의 뜻을 새긴다면 이 책의 제목은 ‘안채에서 알아야 할 방법?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란 뜻으로 《규곤시의방·음식디미방》이라 할 수 있다.
―〈“잠깐 녹두가루 묻혀 만두같이 삶아 쓰나니라” 장계향의 어만두〉 중에서, 235쪽

《음식디미방》의 제일 마지막 쪽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생심〔내지〕 말며 부디 상치〔상하지〕 말게 간수하여 수이〔쉽게〕 떠러〔떨어져〕 버리다〔버리게〕 (하지) 말라.” 지금 전하는 《음식디미방》 원본은 찢어지거나 떨어져나간 흔적이 없을 뿐 아니라 책장이 닳은 자국도 심하지 않다. 아마도 후손들이 관리를 잘해온 모양이다. 그 덕분에 17세기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살았던 영민한 한 부인의 요리 지식이 온전하게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그것도 한글로 말이다.
―〈“잠깐 녹두가루 묻혀 만두같이 삶아 쓰나니라” 장계향의 어만두〉 중에서, 245쪽

“갓 밑동 가오니 가늘게 썰라고 하여야 맛이 나으니 잘게 썰라고 하라고 하시옵. 갓채는 물을 짤짤 끓여 부으면 맛이 좋으니 그리 시키옵. 이 글은 1847년 음력 11월 18일에 여강 이씨가 남편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씨 부인은 15세 때 김진화와 혼인해 줄곧 지금의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살았다. 당시 김진화는 전라도 무장현(茂長縣, 지금의 전북 고창군 무장면)의 현감으로 있었다. 이씨 부인은 하인을 시켜 안동에서 무장현으로 남편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보내면서 한글로 편지를 썼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이라 닥종이한 장에 앞뒤로 빽빽하게 사연을 적었다. 조금이라도 더 쓰려고 ‘하시옵소서’를 ‘하시옵’으로 줄여 썼지만, 그래도 공간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이씨 부인은 편지지를 돌려세워 여백을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갓채는 물을 짤짤 끓여 부으면 맛이 좋으니” 여강 이씨 부인의 갓〉 중에서, 267~268쪽

사실 800리나 되는 먼 곳에서 보내온 부인의 음식이 김진화에게 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1848년 음력 9월의 어느 날 편지에서 이씨 부인은 그해 여름에 보낸 즙장을 두고 남편이 맛이 이상하다고 편지를 보낸 것에 매우 서운했던지 그 심정을 낱낱이 적었다. “즙장을 그리 생각하시는 일 답답, 지난번 간 즙장 맛이 좋지 못하오니 갑갑. 즙장을 묻고 이내 비 와 거름이 식어 그리되오니 답답하옵.” 여기에서 즙장은 여름에 담가서 한 달 이내에 바로 먹을 수 있는 즉석 장류를 말한다. …… 편지 내용으로 보아 이씨 부인 역시 1848년 여름에 즙장을 만들어 그 항아리를 두엄, 즉 거름 속에 묻어두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바로 비가내려 거름의 열기가 식어버렸다. …… 이씨 부인은 남은 메줏가루를 싸서 하인의 지게에 실었다. 무장현의 기생에게 시켜서 한번 만들어보라는 듯이. “즙장 메주 조금 남은 것 보내오니 시켜 잡사오실가 보내옵”이라고 썼다.
―〈“갓채는 물을 짤짤 끓여 부으면 맛이 좋으니” 여강 이씨 부인의 갓〉 중에서, 278~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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